1. 시작하는 말
수많은 성경 이야기들 중에서, 야곱의 생애는 우리 인생의 현실적인 모습을 유비적으로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야기로 꼽힌다. 또한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과 인간의 실패가 공존하는 이스라엘 족속의 연약한 모습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사용되고 있다. 즉 야곱은 영웅적인 믿음의 위인으로서 보다는, 하나님의 그를 인도하시고 도우시고, 고쳐서 회복시키시는 모델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야곱의 인생에서 하나님과의 본격적인 만남이 시작되는 것은 ‘벧엘의 경험’(창 28장)으로부터이다. 그곳에서 야곱은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이해와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으며, 그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그에게 이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 사건은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후로 펼쳐지는 야곱의 모든 인생에서 벧엘은 하나님을 대면하는(비록 처음에는 야곱이 인지하지 못하였다고 할지라도) 장소요, 영적인 회복의 장소로서, 야곱의 일생을 관통하는 중대한 의미로 자리 잡게 된다. 본고에서는 ‘벧엘’이라는 장소의 의미와 그곳에서 경험한 야곱의 체험이 야곱의 생애 이야기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에 대하여 살펴볼 것이다.
2. 야곱 이야기의 구조
창세기 25장에서부터 35장까지 이어지는 야곱의 이야기는 교차대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A. 신탁 갈망 : 어려운 출산 - 야곱의 탄생(25:19-34)
B. 막간 에피소드(interlude) : 이방인의 왕실에 머문 리브가 - 이방인과 언약(26:1-35)
C. 야곱이 에서를 두려워하여 도망함(27:1-28:9)
D. 하나님을 만남 : 벧엘 (28:10-22)
E. 하란에 도착(29:1-30)
F. 야곱의 아내들이 자식을 낳음(29:31-30:24)
F'. 야곱의 짐승들이 새끼를 낳음(30:25-43)
E'. 하란을 떠남(31:1-55)
D'. 하나님을 만남 : 얍복강가-브니엘 (32:1-32)
C'. 야곱이 돌아와 에서를 두려워 함(33:1-20)
B'. 막간 에피소드(interlude) : 이방인의 왕실에 머문 디나 - 이방인과 언약(34:1-31)
A'. 신탁 성취 : 어려운 출산 - 야곱이 이스라엘이 됨(35:1-22)
3. 야곱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벧엘 사건
1) 에서를 두려워하여 도망하기까지 (A~C)
야곱은 그의 성장기 동안, 끊임없이 쌍둥이 형인 에서를 향한 경쟁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야곱과 에서의 대결은 어머니의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는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경쟁하듯이 태어났다.(25:22-26) 출생 이후로 나타나는 첫 기록인 팥죽 사건은 두 형제의 치열한 경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25:27-34) 여기에서 야곱은 경쟁의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반면, 에서는 거기에 대해서 별다른 감흥이 없었던 것 같다.(25:32) 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넘긴다고 맹세를 한 후에 떡과 팥죽을 “먹고 마시고 일어나 나갔다.”(25:34) 그는 하나님이 주신 크나큰 축복의 권리인 장자의 명분을 이토록 쉽게 후루룩 해치워버린 것이다. 본문은 에서의 문제점을 이렇게 선명하게 지적한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25:34) 에서는 하나님이 세워주신 장자의 권리가 곧 축복의 권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거의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영적인 계보의 의미나 축복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아예 관심 자체가 없었다. 에서가 이미 오래 전에 장자권을 야곱에게 팔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축복을 받으려고 했던 것을 보면(27:31), 그가 장자권과 축복권의 상호연관성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못하였으며,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이 없고 무지했었는지를 알 수 있다. 히브리서는 에서의 그러한 행동을 “망령된 자”로 평가하였다.(히 12:16-17)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획득한 야곱은, 속임을 당하여 분노하고 있는 에서를(27:36) 피하여 도망을 갈 수 밖에 없었다. 에서의 분노가 워낙 컸기 때문이다.(27:41) 두려움에 떨며 외삼촌의 식솔들이 살고 있는 하란으로 도망가던 야곱은 광야의 한 곳에 이르렀다.
2) 벧엘의 회복 (D)
해가 지고, 캄캄한 어둠이 찾아오자, 더 이상 길을 재촉하기가 어려웠던 야곱은 그곳에서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그대로 누워서 하룻밤을 유숙하게 되었다.(28:11) 그런데 그는 여기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된다. 꿈속에서 놀라운 천상의 광경을 본 것이다.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28:12-13) 비록 꿈속이지만, 여호와께서 그에게 친히 나타나셔서 그의 조부 아브라함을 상기시키고, 그 신앙전통이 아버지 이삭을 거쳐 그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신 것이다. 야곱은 나중에 잠에서 깨고 난 후, 그곳이 바로 “벧엘”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28:19) 벧엘은 그의 조부 아브라함이(아브람이던 시절에) 처음 제단을 쌓고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곳이었다.(13:3-4) 이 유서 깊고 의미 있는 곳에서 하나님은, 심히 외롭고 지쳐있는 야곱에게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28:13) 하고 말씀하면서,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 면면히 내려오는 그 은혜와 축복이 야곱에게도 함께할 것을 상기시켜 주신 것이다.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28:13,15) 야곱은 그제서야 그곳이 바로 그의 조부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바로 그 ‘벧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브라함 이후로 사람들은 그곳을 루스(Luz)라는 지명으로 바꿔 부르고 있었지만, 그곳은 분명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났던 바로 그 벧엘(하나님의 집)이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28:16) 하고 고백하면서, 야곱은 즉시 그가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워 제단을 만들고 그 위에 기름을 부으면서 아브라함이 그곳에서 드렸던 제사를 재연했다. 그리고 그 곳 이름을 다시 “벧엘(하나님의 집)”이라 불렀다.(28:19)
그곳 벧엘에서 야곱은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두 가지의 서원을 한다. 첫째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하는 것이다. 이것은 조건부의 서원이라기보다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게 하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기대와 소망인 동시에 그러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28:21)으로 모시겠다는 신뢰의 표현이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라고 하는 십일조의 서약이다. 이렇게 볼 때,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바쳤던 전리품 상납의 성격을 가진 십일조(14:20)를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의 원형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야곱이 하나님께 드리기로 작정한 십일조를 십일조 헌물의 원형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 하겠다. 벧엘에서 하나님께 드린 두 가지의 헌신의 서원과 함께 야곱의 인생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렇게 야곱 이야기의 전반부(A~F)는 벧엘 사건으로 절정을 이룬다.
4. 과거와 미래의 언약이 공존하는 약속의 땅인 벧엘
아버지와 형을 속여 축복을 가로챘던 야곱은 아버지의 허락을 받은 후(28:1-2) 두려움과 불안에 떨며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향하였다. 이때 이삭은 야곱에게 “아브라함에게 주신 허락하신 복”을 야곱에게도 주시기를 기원하였다.(28:4) 야곱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이주했던 그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브엘세바에서 벧엘까지는 90킬로미터 정도 되는 거리로, 보통 2-3일 길이었다. 벧엘에서 하란까지 가려면 앞으로 700킬로미터 정도를 더 가야 하는, 거의 한 달이 걸리는 힘겨운 여정이었다. 그곳에 밤이 찾아오자, 어둠이 짙게 드리워진 광야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뿐이었다. 밤의 어두움은 그를 더욱 두렵게 만들었고, 어디로 가야할지 조차 구별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곳에서 야곱은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28:11) 잠이 들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깊은 잠에 빠졌을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임하셔서 축복을 확인해 주셨듯이(15:12-18), 야곱도 꿈에 환상을 보게 된다.(28:12) 이 꿈은 지금까지의 야곱과 경계선을 긋는 놀라운 전환점이 된다. 지금까지 장자의 축복권을 손에 쥐기 위해 살아온 야곱이 이제 드디어 그 모든 것의 주체자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한 것이다. 그동안 아버지와 어머니를 통해서 ‘귀로 듣기만 했던 하나님을 이제는 뵈옵는’(욥 42:5) 역사적인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야곱에게 자손과 땅을 약속하시면서 주신 표현(28:13-14)을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13:14-16)과 비교해 볼 때, 내용뿐 아니라 단어와 표현까지도 일치하는 유사성을 보인다.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13:15) - 네가 누워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28:13)”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13:16) - 너의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28:14)”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13:14) -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28:14)” 물론 다른 곳에서도 땅에 대한 약속들이 나타나지만(12;7, 15:18, 17:8, 24:7), 13:14-16과 28:13-14에서 유사하게 쓰이고 있는 단어들이 다른 곳에는 없다. 두 구절 모두 벧엘과 연관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곳은 특별히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며,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곳이다.(13:4) 그러므로 “벧엘”이란 곳은 야곱에게 있어서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곳이었다.
5. 거룩한 두려움을 깨달은 장소인 벧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28:16)라는 말을 통해, 야곱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벧엘에서 추상적이고 관념적이었던 그의 신앙이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로 바뀌었다. 그런 야곱에게 지금까지의 두려움과는 전혀 다른 두려움이 임하였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다 이곳이여...”(28:17) 지금까지 그는 에서에 대한 두려움과 그가 처한 상황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전혀 다른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지금까지의 두려움은 현실적인 위험과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공포였지만, 이제는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28:17절이 묘사하고 있는 이 두려움은 그가 평생 경험했던 두려움 중에 가장 바람직하고 건강한 두려움이었다. 지금 야곱이 느끼는 두려움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인 인간이 느끼는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이 건강한 두려움은 그동안 두려워하던 모든 현실적인 공포들을 능히 소멸시켜주는 그런 두려움이었다. 야곱을 만나주신 하나님은 그에게 놀라운 약속을 주신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28:13-15) 야곱이 이 땅을 떠난 이후에 다시 돌아와서 여전히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보호하심을 누릴 것이라는 절대적인 약속이다. 이제 야곱은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려워할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임을 깨닫고 그는 이제 경배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곳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28:17) 야곱은 경건함에 쌓여,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28:18) 부었다. 그리고 그곳의 이름인 벧엘(하나님의 집)을 찬양하며, 예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다.
6. 브니엘의 승리는 벧엘의 완성 (D')
야곱 인생의 또 한 번의 전환점은 얍복강가에서 경험한 두 번째 하나님과의 만남이다.(32:1-32) 20년 전 형을 속이고 도망갔던 야곱이 처자를 거느리고 많은 재산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그는 형 에서에게 사람을 보내어, 자기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전했다. 에서는 동생이 온다는 말을 듣고 400인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동생을 맞이하러 나왔다.(32:6) 야곱은 그것이 환영인지 보복인지 알 길이 없어 심히 두렵고 답답했다.(32:7) 그래서 처자들과 종들과 짐승 떼만 얍복강을 건너게 하고 자기는 강 이쪽 편에서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형이 처자와 종들을 공격하면 자기는 혼자 도망치고, 그렇지 않고 형이 반갑게 맞아주는 것을 보면, 자기도 강을 건너가려는 속셈이다. 만약의 경우, 처자들은 죽더라도 자기는 살아야 되겠다는 것이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32:11) 이러한 상황에서 야곱은 얍복 나루터 이편에 혼자 쪼그리고 앉아서 정황을 살피고 있는데, 갑자기 어둠속에서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야곱과 씨름을 하기 시작했다.(32:24) 야곱은 밤새도록 그 ‘어떤 사람’과 씨름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그는 ‘야곱이 함부로 이름을 물을 수 없는 분’으로 나타난다.(29) 이것은 전형적인 장면(type scene)으로서 이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었음을 말해준다.(창 18-19장, 삿 6, 13장) 야곱은 ‘내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다’고 고백하였다.(30) 그런데 ‘어떤 사람’(하나님)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쳤다고 기록되어 있다.(25) 여기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두 가지 질문이 발생한다. ①하나님이 야곱과의 씨름에서 이기기 위하여, 꼭 허벅지 관절을 쳐서 어긋나게 하는 필살기까지 써야만 했는가?’ ②어쨌든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서 더 이상 씨름을 할 수 없게 되었다면, 야곱이 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어떤 사람)은 야곱에게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29)라고 선언하면서, 승리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부여하였다. 야곱이 ‘이겼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 문제 풀기 위하여, 야곱의 ‘사실상의 패배’(25)와 ‘승리 선포’(28)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26절은 바로 이 막간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26) 여기에서 야곱은 허벅다리 관절이 위골된 상태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는 힘을 전혀 쓸 수 없는 상태에서도, 그의 적수를 놓지 않았다. 그는 힘을 전혀 쓸 수 없는 상태에서도 끝까지 매달렸다. 야곱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 이 사람으로부터 ‘복’을 받지 못한다면, 그와 그의 가족은 에서에 의해 ‘몰살을 당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듯하다. 호세아 선지자는 바로 이 점을 잘 포착하였다. “야곱이 모태에 있을 때에는 형과 싸웠으며, 다 큰 다음에는 하나님과 대결하여 싸웠다. 야곱은 천사와 싸워서 이기자, 울면서 은총을 간구하였다. 하나님은 베델에서 그를 만나시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호 12:3-4; 표준새번역) 즉, 창세기 기자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한 것에 대하여, 호세아는 ‘울며 은총을 간구하였다.’로 설명하였다. 이것은 본문을 이해하는 좋은 열쇠가 된다. 하나님의 씨름에서는 자기 고집대로 이기려고만 하면 오히려 패배자가 되고, 반대로 하나님께 항복하여 “울며 은총을 간구”하면, “이스라엘(이긴 자)”이 되는 것이다. 야곱은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항복했기 때문에 이긴 자가 된 것이다. 항복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야곱은 그곳 이름을 “브니엘(하나님의 얼굴)”(32:30)이라 명명하여 축복의 땅으로 삼았다.
이 사건은 벧엘 사건과 함께, 야곱의 인생을 특징짓는 사건이 되었는데, 주목할 것은 본문의 구조상으로 볼 때, 브니엘의 사건은 벧엘 사건의 완성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벧엘에서의 약속(28:15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은 브니엘을 통해 성취(33:4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되었으며, 벧엘에서 주어졌던 소망(28:21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이 브니엘에서 이스라엘(32:28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로 완성되었다.
7. 엘벧엘, 벧엘을 기억하라.(A')
그 후로 디나의 사건을 겪으며(34:1-31), 괴로워하여 쇠약해진 야곱에게 하나님은 “벧엘로 올라가라”는 명령을 주신다.(35:1) 이제 벧엘은 브니엘로 응답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상징하는 이름이 된 것이다. 그는 다시 벧엘로 올라가서 다시금 제단을 쌓고, 그곳 이름을 “엘벧엘(벧엘의 하나님)”로 불렀다.(35:7) 하나님은 벧엘을 통하여 브니엘로 응답하시는 분이기에, 언제나 벧엘을 기억하라는 의미가 된다.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은 야곱에게 약속과 소망을 주셨고, 얍복강가에서 만난 브니엘의 하나님은 그 약속을 성취하셨다.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와서, 그토록 장자의 축복을 갈망하던 야곱은 드디어 이스라엘이 됨으로 그것을 성취하였으며, 이제 엘벧엘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8. 결론
벧엘은 야곱의 일생을 관통하는 의미를 지닌 대단히 중요한 장소임을 살펴보았다. 자신의 꾀를 의지하며 어머니 리브가의 도움으로 지내오던 야곱이 벧엘의 경험을 통하여, 이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요청하게 되었다. 야곱은 벧엘의 서원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새롭게 맺어가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은 야곱이 완전하기 때문에 부르신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여기저기에서 야곱의 허점들이 드러났다. 약삭빠르게 형의 장자권을 취하고, 온갖 거짓말로 아버지를 속이기도 하였다. 그리고도 반성과 회개는 하지 않고 형을 두려워하여 몰래 도망을 가고 있는 어리석고 악한 인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벧엘을 통하여 그를 만나주셨고,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을 그에게 확증해주셨다. 벧엘은 그 이후에도 야곱 인생의 중요한 지점마다 다시 언급되어, 그를 회복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31:13, 35:3,7)
하나님이 왜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선택하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롬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다만 영적인 축복에 대한 야곱의 소망과 갈급함을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신 것은 아닌가 추측해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도 명확한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럴 것이라 하셨고 그렇게 이루어 가셨다는 사실 뿐이다.(롬 9: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분명한 것은 야곱처럼 연약하고 죄 많은 우리를 위해서도 하나님은 벧엘을 예비하셔서 만나주시고, 브니엘을 통하여 우리의 모난 부분을 정으로 치고, 다듬어 우리를 만들어 가실 것이며, 매순간 '벧엘'을 기억하며 '엘벧엘'의 삶을 살아가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참고문헌
우남식, 『창세기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 말씀사, 2011
송병현, 『엑스포지멘트리 창세기』, 국제제자훈련원, 2010
Wenham, Gordon J, 『WBC 창세기 16-50』, 윤상문・황철수 역, 솔로몬, 2001
댓글 1
전동호 2018.2.19 14:48
야곱...벧엘.. 내용 잘 읽었습니다. ^^